혈우병

Hemophilia



  • 혈우병이란?

혈우병은 넓은 의미로는 혈액이 적절하게 응고되지 않는 모든 질환을 포함하며, 특히 혈액 응고 과정에 필요한 여러 ‘응고인자’ 가운데 특정 인자를 충분히 생성하지 못하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혈우병 중 가장 잘 알려진 유형은 8번 응고인자가 부족한 ‘혈우병A’와 9번 응고인자가 부족한 ‘혈우병B’입니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혈우병은 ‘제8번 응고인자 결핍 질환’과 ‘제9번 응고인자 결핍 질환’을 뜻합니다.
혈우병A와 B를 합친 유병률은 인구 10만 명당 약 10-15명으로, 이를 바탕으로 추정할 때 우리나라에는 최소 5,000명 이상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진단율은 이보다 낮은 편입니다.


  • 혈우병의 증상

8번과 9번 응고인자가 결핍되면 피가 잘 응고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출혈이 쉽게 일어나고, 출혈이 발생하면 지혈이 잘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환자들은 “피가 잘 멎지 않아요”, “이상하게 몸에 아주 큰 멍이 자주 생겨요”, “무릎관절에 출혈이 생겼어요” 등의 증상을 호소합니다. 이러한 출혈이 반복되거나 조절되지 않을 경우, 장기에 손상을 주거나 후유증을 남길 수 있습니다.
혈우병A와 혈우병B는 응고인자의 활성도에 따라 경증, 중등증, 중증으로 나뉩니다. 응고인자의 활성도가 5%를 초과하면 경증으로 분류합니다. 경증 환자는 증상이 비교적 경미하기 때문에 혈우병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지내다가, 성인이 되어 수술 또는 시술 치료 후 지혈이 잘 안 되는 등의 계기로 진단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응고인자의 활성도가 1% 미만인 환자, 즉 체내에 응고인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중증 환자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중증 혈우병 환자에서는 외부 요인이나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도 저절로 출혈이 일어나는 ‘자연 발생(자발) 출혈’이 흔하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중증 환자들은 대부분 영유아기부터 출혈 문제가 나타나는데, 유아기에 반상출혈 같은 큰 멍이 특별한 이유 없이 몸에 생긴다거나, 예방접종 또는 정맥주사 후 지혈이 잘 안 되는 경우, 또 아이가 걷기 시작하는 시기에 관절이 붓고 통증이 동반되는 관절 출혈 등이 나타나면 혈우병을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뇌출혈, 근육 또는 관절의 출혈은 혈우병 환자들이 특별히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증상입니다. 뇌출혈은 신경계에 비가역적인 후유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육이나 관절의 출혈은 혈우병 환자에게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증상으로, 심부 혈종이나 감염, 관절병증 등의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 외에 혈뇨나 혈변 같은 내부 장기의 출혈, 복강 내 출혈, 그리고 발치를 비롯한 치과 치료 후 지혈이 잘 안 되는 사례 또한 혈우병 환자들이 많이 경험하는 증상입니다.


  • 혈우병의 원인

후천적으로 응고인자에 대한 항체가 생성되는 ‘후천성 혈우병’도 존재하지만, 이는 굉장히 드뭅니다. 환자 대부분은 8번, 9번 응고인자를 생성하는 X염색체에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해, 선천적으로 응고인자를 제대로 생성하지 못하는 유전성 혈우병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혈우병은 영국 왕실과 러시아 왕실에서 발생한 질환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혈우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돌연변이는 X염색체를 따라 열성 유전되기 때문에 혈우병 환자는 대부분 남자이며, 여자는 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 혈우병의 진단

혈액검사로 8번이나 9번 응고인자 수치를 확인해 진단할 수 있습니다.


  • 혈우병의 치료

혈우병 환자들은 혈액 응고인자 활성도를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거나, 지혈을 도와주는 약제를 투약하는 등 평생 관리가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부족한 응고인자를 수혈을 통해서만 보충할 수 있었는데, 잦은 수혈로 인한 감염 문제나 출혈 때문에 혈우병 환자들의 평균수명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낮았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다양한 치료법이 개발되어 환자들의 평균수명이 일반인과 거의 비슷해졌으며, 일반인과 같은 일상을 누리는 ‘혈우병으로부터 자유로운(hemophilia free)’ 삶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즉 혈우병은 더 이상 난치병이 아니라, ‘치료와 완치가 가능한 질환’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치료 목표가 ‘적은 출혈 횟수’, ‘출혈 예방’이었으나, 최근에는 이를 넘어 ‘출혈 횟수 0회(zero bleeding)’,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환자들이 사용 중인 기본 치료제는 응고인자 약제와 비응고인자 약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응고인자 약제
응고인자 약제는 혈장 유래 혹은 유전자 재조합으로 만들어지며, 약제의 반감기에 따라 표준 반감기 약제와 반감기 연장 약제가 있습니다. 응고인자 약제를 출혈이 있을 때만 투약하는 방법보다는, 주 2회 또는 3회 꾸준히 투약해 체내 응고인자 농도를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는 ‘예방요법’이 현재 세계혈전지혈학회와 세계혈우연맹에서 추천하는 표준치료입니다. 이러한 예방요법은 중증 혈우병 환자에게 특히 효과적인 치료로, 자발 출혈 횟수를 줄일 수 있으며, 중등증 혹은 경증 혈우병 환자처럼 좀 더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응고인자 약제는 정맥으로 투약해야 하므로 혈우병A 환자는 주 3회, 혈우병B 환자는 주 2회 혈관을 찾아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평생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감기 연장 약제는 체내에서 오래 작용하기 때문에 혈우병A는 주 3회에서 주 1-2회, 혈우병B는 주 2회에서 2-3주에 1회까지 약제 투여 빈도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치료가 편해지므로 많은 환자들이 선호합니다. 하지만 환자들의 생활 습관이나 활동 범위가 다르고 약제 선호도도 다르므로 여러 상황을 고려해 가장 적절한 약제를 처방하게 됩니다.

2) 비응고인자 약제
비응고인자 약제는 피하주사로 투약하기 때문에, 평생 치료가 필요한 혈우병 환자에게는 정맥주사에 비해 편리한 방식이 큰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약제가 기존 응고인자 약제보다 출혈 예방 효과가 더 뛰어난 것으로 나타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출시되어 있는 비응고인자 약제(헴리브라)는 체내의 9번과 10번 응고인자를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중 항체 약제로, 8번 응고인자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4주에 1회 피하주사로 투약하므로 환자의 부담이 적고, 정맥주사 방식의 응고인자 약제 투약이 어렵거나 적합하지 않은 환자에게도 예방요법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또한 경증 혈우병 수준으로 환자의 지혈 능력을 높여 출혈 예방 효과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약의 기전 상 혈우병B 환자에게는 사용할 수 없고, 응고인자 자체를 보충해주는 약이 아니기 때문에 출혈이 발생하면 응고인자 약제를 추가로 투여해야 하는 등의 한계가 있습니다.
현재 다양한 비응고인자 치료제가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기존 약과 비슷한 기전의 이중 항체 약제 외에도 항트롬빈 합성을 RNA 단계에서 억제해 지혈을 유도하는 신약, 조직인자경로 억제 단일 클론 항체(anti-TFPI antibody) 등이 개발되었으며, 이러한 약제는 혈우병A와 혈우병B 모두에 적용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3) 유전자치료
또 하나의 희망은 혈우병에서 유전자치료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혈우병 유전자치료제는 응고인자를 정상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유전자를 바이러스 벡터에 실어 환자의 간세포 안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혈우병A에서 1종, 혈우병B에서 2종의 약제가 이미 시판 중입니다. 고가의 비용, 간수치 상승 부작용 등 아직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혈우병 완치를 목표로 개발된 약제인 만큼 일부 환자에서는 단 한 번의 약제 투여로 응고인자 활성도를 정상에 가깝게 올릴 수 있는 획기적인 치료입니다.


<글 연세암병원 소아혈액종양과 한승민 교수>